韩国文化阅读欣赏【望洋兴叹 】
나는 그의 연주를 보고 내 실력이 못미침에 탄식했지만, 끝내 그에게서 배울 순 없었다. 후에 재봉사 청년이 글자를 안다는 것을 알고, 그에게 가르침을 청했다. 그는 소공조(간이 악보)나 대공조(정식 악보)의 음계위치를 한 종이에 적어 나에게 주었고, 나는 이로써 호금 연주에 입문했다. 현재 정확한 음계를 탈 수 있는 이유 중의 반은 이전에 약간 바이올린을 킨 경험 때문이고, 반은 여전히 그 청년의 가르침이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.
我对他的拉奏望洋兴叹,始终学他不来。后来知道大汉识字,就请教他。他把小工调、正工调的音阶位置写了一张纸给我,我的胡琴拉奏由此入门。现在所以能够摸出正确的音阶者,一半由于以前略有摸小提琴的经验,一半仍是根基于大汉的教授的。
산중에 있는 작은 찻집 안의 비 내리는 창가에서, 나는 호금으로 여유롭게(왜냐하면 빠르게 연주하면 틀리기 때문에) 각종 서양소곡을 연주했다. 두 딸은 서로 맞춰 노래를 부르는데, 마치 서호에서 노래를 불러 돈을 버는 사람들 마냥, 그 촌의 사람들이 모두 와서 정도로 사람들을 모았다.
在山中小茶店里的雨窗下,我用胡琴从容地(因为快了要拉错)拉了种种西洋小曲。两女孩和着了歌唱,好像是西湖上卖唱的,引得三家村里的人都来看。
한 딸이 <어광곡>을 부르며, 내가 호금으로 반주하도록 요구했다. 나는 그 애의 노래에 맞추어 연주하자, 촌의 젊은 사람들도 제창하기 시작하니, 한 때 장마인 황량한 산이 따뜻할 정도로 달아오르게 했다. 나는 이미 7~8년 동안 음악 선생을 했었는데, 이미 피아노 반주를 이용해 혼성4부합창을 했었고, 베토벤의 소나타도 연주했었다. 하지만 태어나서, 오늘과 같은 음악의 흥취를 경험해보진 못했다.
一个女孩唱着《渔光曲》,要我用胡琴去和她。我和着她拉,三家村里的青年们也齐唱起来,一时把这苦雨荒山闹得十分温暖。我曾经吃过七八年音乐教师饭,曾经用钢琴伴奏过混声四部合唱,曾经弹过贝多芬的桑塔纳。但是有生以来,没有尝过今日般的音乐的趣味。
지나가는 빈 인력거 두 대를 잡았다. 나는 찻값을 지불하고, 호금을 돌려주었다. 한촌의 젊은이들과 작별인사를 하고, 인력거에 올랐다. 가림막이 내 앞을 가리니, 비 내리는 풍경을 볼 수 없었다. 나는 방금 전의 경험을 돌이켜 생각하니, 호금이란 이 악기는 매우 매력적인 악기라고 생각했다.
两部空黄包车拉过,被我们雇定了。我付了茶钱,还了胡琴,辞别三家村的青年们,坐上车子。油布遮盖我面前,看不见雨景。我回味刚才的经验,觉得胡琴这种乐器很有意思。
피아노는 관처럼 육중하고, 바이올린은 1대에 수천위안 정도인데다, 정교하게 만들어졌지만, 세상에서 이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? 호금은 한 대에 단지 2~3자오이고, 비록 음역대가 바이올린처럼 넓진 않지만, 그래도 일반적인 소곡은 능히 연주할 수 있다. 비록 음색이 바이올린만큼 우미하진 못하지만, 구조가 알맞고, 그것이 만들어내는 소리도 들을 만하다.
钢琴笨重如棺材,小提琴要数十百元一具,制造虽精,世间有几人能够享用呢?胡琴只要两三角钱一把,虽然音域没有小提琴之广,也尽够演奏寻常小曲。虽然音色不比小提琴优美,装配得法,其发音也还可听。
이러한 악기는 우리나라 민간에서 매우 유행하여, 이발소 안에도, 재봉점에서도, 강북의 나룻배 위에도, 외딴 마을에도 그것이 있다. 만약 몇 개의 쉽고 고상한 호금곡을 만들어, 마치《어광곡》과 같이 민간에 유행할 수 있다면, 그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효과는 아마도 학교의 음악 수업보다 더 광범위 할 것이다. 내가 한촌을 떠날 때, 마을의 젊은이들은 모두 내가 인력거에 타는 것을 배웅하며, 이별의 정을 표현했다.
这种乐器在我国民间很流行,剃头店里有之,裁缝店里有之,江北船上有之,三家村里有之。倘能多造几个简易而高尚的胡琴曲,使像《渔光曲》—般流行于民间,其艺术陶冶的效果,恐比学校的音乐课广大得多呢。我离去三家村时,村里的青年们都送我上车,表示惜别。
나도 약간 아쉬움을 느꼈다. (이미 그들에게 얼버무리며 “다음주에 다시 올게!”라고 말했다. 사실 아마도 나는 이번 생에 이 마을에 다시 와서 차를 마시고 호금을 킬 순 없을 것 같다.) 만약 호금의 인연이 없었다면, 한촌의 젊은이는 이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무슨 헤어지기 아쉬운 감정이 있었겠는가, 그리고 나도 또한 이런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무슨 아쉬움이 있었겠는가? 옛말에 이르기를 “음악으로서 조화를 가르친다.”고 했다. 내가 7~8년의 음악 교사를 하며 이 말을 경험하지 못했는데, 뜻밖에 이날 이런 황폐한 시골에서 실제로 경험했다.
我也觉得有些儿依依。(曾经搪塞他们说:“下星期再来!”其实恐怕我此生不会再到这三家村里去吃茶且拉胡琴了。)若没有胡琴的因缘,三家村里的青年对于我这路人有何惜别之情,而我又有何依依于这些萍水相逢的人呢?古语云:“乐以教和。”我做了七八年音乐教师没有实证过这句话,不料这天在这荒村中实证了。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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